고흐가 가장 조용하게 건넨 축복
'꽃 피는 아몬드 나무'에 대하여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을 떠올리면 우리는 흔히 요란한 색채를 먼저 떠올린다. 
노랗게 들끓는 해바라기, 하늘을 휘감는 푸른 소용돌이, 캔버스를 긁어내듯 쌓아 올린 두꺼운 붓질. 
그의 그림은 늘 격정적이고, 고통스럽고, 때로는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그런데 고흐의 작품 가운데, 그 모든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결을 가진 그림이 하나 있다. 바로 〈아몬드 나무〉다.
이 그림 앞에 서면 묘한 감정이 든다. 격렬함 대신 고요함이 있고, 절규 대신 숨을 고르는 여백이 있다. 
그래서 이 그림은 ‘고흐답지 않다’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고흐다운 작품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그림은 그의 불행이 아니라, 그가 끝까지 놓지 않았던 사랑의 방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병원에 도착한 한 통의 편지

1890년 초봄, 고흐는 프랑스 남부 생레미의 정신병원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이미 여러 차례 정신적 붕괴를 겪었고, 자신의 상태가 언제 다시 무너질지 알 수 없는 불안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그에게 생계 수단이기 이전에, 스스로를 붙잡아 두는 마지막 끈이었다. 

그 무렵, 동생 테오에게서 편지가 도착한다.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이었다. 
아이의 이름은 빈센트 빌럼 반 고흐.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았다는 사실은 고흐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그는 편지에서 기쁨을 숨기지 않았고, 이 아이의 탄생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고흐는 조카를 직접 안아보지도 못했고, 멀리 떨어진 병실에서 소식만 들었을 뿐이었지만, 그 생명의 등장은 그의 내면에 오랜만에 따뜻한 불을 켜주었다.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이 아이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그가 가진 것은 많지 않았다. 명성도, 돈도, 안정된 삶도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그림이 있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작품이 바로 〈아몬드 나무〉다.


가장 먼저 피는 꽃을 그리다

아몬드 나무는 유럽에서 봄을 가장 먼저 알리는 나무 중 하나다. 
겨울의 찬 기운이 완전히 가시기도 전에, 하얀 꽃을 터뜨린다. 그래서 이 나무는 오래전부터 탄생, 희망, 새로운 시작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고흐는 의도적으로 이 나무를 선택했다. 

아직 세상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아기에게,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나무를 선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림 속의 가지는 하늘을 가로질러 뻗어 있고, 꽃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듯 가볍다. 
어떤 과장된 연출도 없다. 다만, 피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전부인 꽃들이다. 
이 그림에는 땅이 없다. 나무의 뿌리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하늘과 가지, 그리고 꽃만 존재한다. 
이는 마치 아직 세상에 발을 딛지 않은 존재, 가능성 그 자체를 그린 것처럼 느껴진다. 
태어남이라는 사건이 얼마나 순수하고, 설명이 필요 없는 일인지를 고흐는 이 단순한 구도로 보여준다.






일본 판화에서 찾은 평온함

〈아몬드 나무〉가 특별한 이유 중 하나는, 이 그림이 고흐가 평생 동경했던 일본 미학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고흐는 일본 판화를 수집했고, 그 단순한 선과 여백, 자연을 대하는 태도에 깊이 매료되었다. 

이 그림에서는 서양 회화 특유의 원근이나 깊이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평면적인 하늘 위에 가지가 장식처럼 펼쳐진다. 
꽃은 사실적으로 묘사되기보다는 리듬감 있게 배치되어 있고, 하늘은 하나의 배경색처럼 고요하다. 
이는 감정을 쏟아붓는 그림이 아니다. 오히려 감정을 내려놓은 상태에서 그린 그림에 가깝다. 
고흐는 이 그림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는 조카를 위해, 그 생명을 위해 한 발 물러선다. 그 점에서 이 작품은 매우 이례적이다.


고흐가 남긴 가장 다정한 기록

고흐는 생전에 거의 인정받지 못했고, 이 그림 역시 그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이 작품은 많은 사람들에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림’으로 기억된다. 
병원 대기실, 아이 방, 거실 벽에 걸렸을 때 가장 자연스러운 고흐의 그림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 그림이 주는 위로는, 고흐가 이 작품에서 자기 자신보다 누군가를 먼저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늘 자기 내면의 고통을 캔버스에 쏟아냈지만, 이 그림에서는 고통이 아니라 축복을 선택했다. 
 〈아몬드 나무〉는 고흐가 세상에 남긴 가장 조용한 인사말 같다. 

“괜찮다. 시작해도 된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 그림은 오래 남는다. 
소리 없이, 그러나 분명하게.

고흐, 아몬드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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