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크의 〈절규〉, 소리치는 사람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었다

뭉크의 〈절규〉, 소리치는 사람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었다

핼러윈 주간이면 어김없이 패러디로 돌아오는 얼굴이 있습니다. 두 손으로 볼을 감싸고 입을 벌린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입니다. 그런데 화가가 남긴 메모를 읽어 보면 그림 속 인물은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아니라 자연을 뚫고 지나가는 비명을 '듣고' 있는 사람에 가깝습니다. 한 장이 아니라 여러 장으로 존재하는 그림, 구석에 적힌 수상한 문장, 두 번의 도난과 1억 달러가 넘는 낙찰가까지, 〈절규〉를 둘러싼 이야기를 정리했습니다.

해 질 녘 산책길에서 시작된 그림

노르웨이 국립미술관(나쇼날무세트)의 설명에 따르면 뭉크는 1892년 1월 22일 날짜로 노트에 한 장면을 적었습니다. 두 친구와 길을 걷던 중 해가 지고 하늘이 핏빛으로 붉게 물들었고, 그는 우울에 잠겨 죽을 만큼 지친 채 난간에 기대섰습니다. 친구들은 계속 걸어갔고, 혼자 남은 그는 불안에 떨며 자연을 꿰뚫고 지나가는 크고 끝없는 비명을 느꼈다고 썼습니다.

이 기록을 알고 그림을 다시 보면 장면이 달라집니다. 화면 뒤쪽으로 멀어지는 두 사람은 앞서 걸어간 친구들이고, 앞쪽의 인물은 귀를 막듯 얼굴을 감싼 채 서 있습니다. 소용돌이치는 붉은 하늘과 출렁이는 피오르는 바깥 풍경이라기보다 그 순간 화가가 느낀 마음속 공포를 옮겨 놓은 것에 가깝습니다.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리기보다 느낀 것을 그리려 한 이 태도 때문에 〈절규〉는 표현주의의 출발점으로 자주 꼽힙니다.

〈절규〉는 한 점이 아니다

흔히 〈절규〉를 한 점의 그림으로 생각하지만, 뭉크는 같은 장면을 여러 번 다시 만들었습니다. 널리 알려진 것은 네 점입니다. 1893년 판지에 템페라와 크레용으로 그린 그림은 오슬로의 노르웨이 국립미술관에 있고, 미술관은 이것을 가장 먼저 만들어진 버전으로 봅니다. 크기는 세로 91cm, 가로 75cm 정도로 생각보다 크지 않습니다. 같은 해의 크레용 드로잉과 1910년 무렵의 그림은 오슬로의 뭉크 미술관(MUNCH)이 갖고 있습니다. 나머지 한 점은 1895년 파스텔화로, 개인 소장품입니다.

여기에 1895년의 석판화도 있습니다. 판화로 찍어 여러 장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절규〉의 이미지가 일찍부터 널리 퍼질 수 있었습니다. 뭉크 미술관은 그림 한 점, 드로잉 한 점, 석판화 여섯 점을 소장하고 있다고 밝힙니다.

재료가 약하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판지와 종이는 빛에 쉽게 상하기 때문에 뭉크 미술관은 세 가지 버전(그림·드로잉·판화)을 하루 동안 번갈아 걸고, 나머지는 어둠 속에서 쉬게 합니다. 어느 버전도 계속 걸어 둘 수 없다는 것이 미술관의 설명입니다. 국립미술관도 1893년 그림이 걸린 전시실의 조명을 일부러 어둡게 둡니다. 오슬로에 가서 원화를 본다면 이런 사정을 알고 가는 것이 좋습니다.

구석의 연필 글씨, 범인은 화가 자신

국립미술관의 1893년 그림 왼쪽 위 하늘에는 연필로 쓴 작은 글씨가 있습니다. '미친 사람만이 그릴 수 있었을 것'이라는 뜻의 문장입니다. 오랫동안 이 글씨는 그림에 화가 난 관람객이 남긴 낙서로 여겨졌습니다.

2021년 2월 노르웨이 국립미술관은 적외선 촬영으로 글씨를 자세히 살펴 뭉크의 일기·편지 필체와 비교한 결과, 뭉크가 직접 쓴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큐레이터 마이 브릿 굴렝은 이 문장이 1895년 무렵, 그러니까 그림이 노르웨이에서 처음 공개되어 혹독한 비평을 받던 때 적혔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습니다. 당시 한 토론회에서는 작품을 근거로 화가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는 말까지 나왔다고 합니다. 미술관은 이 문장을 비꼬는 농담으로도, 상처받기 쉬웠던 화가의 마음이 드러난 흔적으로도 읽을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두 번 사라졌다 돌아온 그림

유명한 만큼 수난도 겪었습니다. 1994년 2월 12일,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이 개막하던 날 도둑들이 오슬로 국립미술관에 들어가 1893년 그림을 가져갔습니다. 미술관은 몸값 요구를 거부했고, 노르웨이 경찰은 영국 수사관들과 함께 위장 작전을 벌여 같은 해 5월 7일 그림을 손상 없이 되찾았습니다.

10년 뒤인 2004년 8월 22일에는 무장한 복면 강도들이 대낮에 뭉크 미술관에 들어와 관람객 앞에서 1910년 무렵의 〈절규〉와 〈마돈나〉를 떼어 갔습니다. 두 작품은 2006년에야 돌아왔습니다. 이 사건 뒤로 미술관들은 보안을 크게 강화했는데, 지금 오슬로에서 〈절규〉를 보려면 유리와 경비 너머로 마주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1억 1,992만 달러, 그리고 서울에 온 〈절규〉

2012년 5월 2일 뉴욕 소더비에서는 개인이 갖고 있던 1895년 파스텔 버전이 수수료를 포함해 1억 1,992만 2,500달러에 팔렸습니다. 당시 경매에 나온 미술품 가운데 가장 높은 가격으로, 2010년 피카소 그림이 세운 1억 650만 달러 기록을 넘어섰습니다. 그림을 내놓은 사람은 뭉크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사업가의 아들 페테르 올센이었습니다.

한국 관람객에게도 〈절규〉는 낯설지 않습니다. 2024년 5월부터 9월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 뭉크 회고전에는 세계 여러 기관과 소장가의 작품 140여 점이 모였고, 1895년 석판화 〈절규〉가 함께 걸려 많은 관람객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림이 아닌 판화였지만, 그 작은 종이 한 장 앞에 줄이 늘어섰다는 사실 자체가 이 이미지가 얼마나 깊이 사람들 마음에 자리 잡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오늘 우리가 〈절규〉를 다시 보는 이유

뭉크는 어린 시절 어머니와 누나를 병으로 잃었고, 평생 불안과 병, 죽음을 그림의 주제로 삼았습니다. 〈절규〉가 13년 넘게 여러 재료로 다시 그려진 것도 그 장면이 한 번의 기억이 아니라 그에게 계속 돌아오는 감정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 그림은 핼러윈 가면이나 이모티콘이 되어도 힘을 잃지 않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이 밀려올 때 귀를 막고 서 있는 그 사람의 모습이 지금 우리에게도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절규〉 패러디를 보게 되면, 그가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가득 채운 비명을 견디고 있다는 사실을 한 번 떠올려 보세요. 같은 그림이 조금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참고 자료

대표 이미지 : AI 생성 이미지 — 뭉크 〈절규〉(1893)의 탄생 배경과 네 가지 버전, 낙서 논쟁·도난·경매 기록까지의 뒷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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