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동안 다른 사람으로 산 예술가, 린 허쉬만 리슨 서울 개인전

5년 동안 다른 사람으로 산 예술가, 린 허쉬만 리슨 서울 개인전

1973년부터 5년 동안 '로베르타 브라이트모어'라는 가상의 여성으로 살며 은행 계좌를 열고 정신과 상담까지 받은 예술가가 있습니다. 미국의 미디어아티스트이자 영화감독 린 허쉬만 리슨(1941~)입니다. 그의 60여 년 작업을 모은 아시아 첫 미술관 개인전 '린 허쉬만 리슨: 나의 [나]들'이 10월 21일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막을 올렸습니다. 작품은 200여 점이고 관람은 무료입니다. 이번 전시에서 처음으로 한국어 자막이 달린 인터랙티브 작품들도 직접 만져 볼 수 있습니다.

기술이 나올 때마다 먼저 써 본 작가

린 허쉬만 리슨은 새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누구보다 먼저 그것을 작품 재료로 삼아 온 작가입니다. 1960년대에는 센서가 달린 조각을 만들었고, 1980년대에는 레이저디스크와 터치스크린으로 관객이 이야기를 고르는 작품을 내놓았습니다. 1990년대 말에는 인터넷에서 대화하는 챗봇을, 최근에는 AI와 유전자 편집을 다룹니다. 그래서 흔히 '미디어아트의 선구자'로 불립니다.

하지만 서울시립미술관은 이 전시에서 '기술 선구자'나 '페미니즘 작가'라는 꼬리표보다 그 밑에 깔린 질문 하나에 집중합니다. 기술과 미디어가 바뀔 때 '나'라는 정체성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미술관이 올해 내세운 전시 주제 '기술'에 맞춘 기획이기도 합니다.

전시 제목에도 이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영어 제목 'First Person Plural'은 작가가 1984년부터 찍어 온 영상일기 '전자일기' 연작의 세 번째 작품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한글 제목 '나의 [나]들'의 대괄호는 프로그래밍에서 쓰는 기호입니다. 기술 환경 속에서 복제되고 다시 짜이는 여러 개의 '나'를 뜻합니다.

로베르타 브라이트모어, 5년짜리 퍼포먼스

전시에서 가장 많이 이야기될 작업은 '로베르타 브라이트모어'입니다. 작가는 1973년 가상의 여성 로베르타를 만들고, 옷차림과 화장, 걸음걸이, 필체까지 직접 정했습니다. 그리고 로베르타로서 실제 사회에서 살았습니다. 은행 계좌를 열고, 정신과 상담을 받고, 다이어트 프로그램에도 등록했습니다. 몇 해 뒤에는 로베르타와 똑같이 꾸민 '복수의 로베르타'까지 나타났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1978년 이탈리아에서 치른 퇴마 의식으로 끝이 납니다.

전시장에서는 로베르타의 외모를 설계한 '로베르타 구성 차트 #1'(1975)을 볼 수 있습니다. 함께 볼 만한 작업이 '가상의 비평가 3인'(1968)입니다. 남성 중심이던 당시 미술계에 맞서려고 작가가 지어낸 비평가 세 명의 설정표입니다.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이 되는 이 놀이는 오늘날 SNS의 '부캐'나 온라인 아바타와 이어집니다. 50년 전 작업이 지금 더 가깝게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1996년 처음 만들어 올해 다시 선보이는 '사이버로베르타'(1996/2026)도 있습니다. 원격으로 조종하는 인형 로봇으로, 눈에 달린 카메라로 찍은 영상을 20초마다 웹사이트에 올립니다. 관객이 인형을 보는 동시에 인형도 관객을 보는 셈입니다. 감시와 사생활이라는 지금의 문제를 30년 전에 미리 꺼낸 작품입니다.

한국어로 처음 만나는 인터랙티브 작품

이번 전시만의 볼거리는 관객이 직접 조작하는 초기 인터랙티브 작품들입니다. 레이저디스크로 만든 '로나'(1979~1984)는 관객의 선택에 따라 결말이 달라집니다. 터치스크린으로 이야기에 끼어드는 '딥 컨택트'(1984)는 57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웹 기반 AI 챗봇 '에이전트 루비'(1998~2002)는 원래 영어로만 대화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세 작품 모두 이번 전시에서 처음으로 한글 자막과 한국어 안내가 붙었습니다.

오늘날 챗GPT 같은 AI와 대화하는 일이 익숙해진 관객에게 20여 년 전 챗봇 '에이전트 루비'는 흥미로운 비교 대상입니다. 기계와 대화하며 정을 붙이는 일이 그때 이미 예술의 주제였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관객이 다가가면 센서가 작동해 작가의 숨소리와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숨쉬는 기계 III'(1968)도 놓치지 마세요. 작가의 얼굴과 몸을 왁스로 떠 만든 조각입니다. 작가가 산소텐트에서 치료받던 경험이 바탕이 됐습니다.

여섯 개의 방으로 따라가는 '나'의 확장

전시는 '카멜레온의 고백', '페르소나 만들기', '살과 기계', '스크린, 응답하다', '데이터가 사랑이 될 때', '편집된 미래' 여섯 부분으로 나뉩니다. 타고난 정체성이 사회 속 관계와 기계를 거쳐 넓어지고, 미디어와 네트워크로 이어지다가, 마지막에는 유전공학으로 몸 자체가 편집되는 단계까지 가는 흐름입니다.

작가의 영상일기 '전자일기'(1984~2019)는 지금까지 일곱 편이 나왔습니다. 어린 시절의 상처와 그것을 이겨 낸 과정을 독백으로 담았습니다. 1편부터 6편은 '스크린, 응답하다'에서, 7편은 마지막 '편집된 미래'에서 상영됩니다. 마지막 방에서는 해파리 단백질 유전자를 넣어 빛을 내게 된 고양이 사례를 다룬 '형광 고양이'(2010~2019)가 유전자 편집 시대의 정체성을 묻습니다.

영화감독으로서의 작업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19세기 프로그래머 에이다 러브레이스를 다룬 첫 장편 '에이다 러브레이스', 틸다 스윈턴이 복제인간을 포함한 네 역을 모두 맡은 '테크노러스트'(2002)의 스틸이 걸렸습니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11월부터 내년 1월까지 '새롭게 발견된 여성들'이라는 이름으로 작가의 장편영화를 상영합니다.

관람 정보와 작은 팁

전시는 2027년 2월 21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2층과 3층 전시실, 3층 크리스탈 갤러리에서 열립니다. 예약 없이 무료로 볼 수 있고,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은 쉽니다. 화요일부터 목요일은 오후 8시, 금요일은 오후 9시까지 문을 열어 퇴근 뒤에도 들를 수 있습니다. 11월부터 2월까지 주말과 공휴일은 오후 6시에 닫고, 입장은 문 닫기 1시간 전까지입니다.

작품 해설은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매일 오후 3시에 있고, 전시 해설 앱으로도 들을 수 있습니다. 인터랙티브 작품은 직접 고르고 눌러야 이야기가 이어지니 시간을 넉넉히 잡는 편이 좋습니다. 영상 작품이 많아 2~3시간은 머물 생각으로 가면 좋습니다.

덕수궁 돌담길과 붙어 있는 미술관이라 늦가을 단풍 산책과 묶기에도 좋습니다. 같은 기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의 이대원 회고전은 11월 8일까지이니, 두 전시를 하루에 함께 보는 것도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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