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지 않는 모델과 낡은 목욕탕, 데보라 터브빌의 첫 한국 사진전

웃지 않는 모델과 낡은 목욕탕, 데보라 터브빌의 첫 한국 사진전

서울 회현동 전시공간 피크닉에서 미국 사진가 데보라 터브빌(1932~2013)의 국내 첫 개인전 '데보라 터브빌: 분위기'가 10월 23일 문을 열었습니다. 1970년대 패션 사진의 관습을 뒤집은 작가로 꼽히는 터브빌의 빈티지 프린트와 콜라주 원본 102점, 새로 제작한 프린트 88점까지 약 200점이 2027년 2월 28일까지 전관에 걸립니다. 옷보다 공기를, 모델의 미소보다 쓸쓸한 표정을 찍었던 사진가가 왜 지금 다시 주목받는지, 전시장에서 무엇을 보면 좋은지 정리했습니다.

'패션을 거부한 패션 사진가'는 누구인가

데보라 터브빌은 처음부터 사진가가 아니었습니다. 패션지 '하퍼스 바자'와 '마드모아젤'에서 패션 에디터로 일하다가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카메라를 들었습니다. 잡지 안쪽에서 패션 화보가 만들어지는 방식을 잘 알던 사람이, 바로 그 방식을 벗어나는 사진을 찍기 시작한 셈입니다.

1970년대 패션 사진에서는 옷과 모델을 선명하고 매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기본이었습니다. 터브빌은 헬무트 뉴튼, 기 부르댕과 함께 그 시절 패션 사진의 새 흐름을 이끈 작가로 꼽히지만, 결은 사뭇 달랐습니다. 두 사람이 강렬하고 도발적인 이미지로 이름을 알렸다면, 터브빌의 사진 속 여성들은 낡은 건물과 희미한 빛 속에서 생각에 잠겨 있습니다. 인물의 윤곽은 흐릿하고, 옷은 오히려 배경처럼 물러나 있습니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한 단어로 '분위기'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분위기를 '손에 잡히지 않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무엇'이라고 설명했고, 이번 전시 제목도 여기서 왔습니다. 잉마르 베리만이나 알랭 레네의 영화, 러시아 문학에서 받은 영향이 사진 곳곳에 배어 있다는 평가도 함께 따라붙습니다.

1975년 '배스하우스', 독자 항의를 부른 화보

전시의 출발점이 되는 작품은 1975년 미국 보그에 실린 '배스하우스' 연작입니다. 터브빌은 철거를 앞둔 뉴욕의 낡은 공중목욕탕에서 수영복 차림의 모델 다섯 명을 촬영했습니다. 모델들은 웃지 않고, 서로 시선을 맞추지도 않은 채 텅 빈 공간에 흩어져 있습니다.

화려한 수영복 화보를 기대했던 독자들의 반응은 거셌습니다. 잡지에 항의가 쏟아졌고, 사진을 두고 온갖 불온한 해석이 따라붙었습니다. 터브빌은 훗날 자신은 그저 공간 안에 다섯 인물을 배치하려 했을 뿐이라고 회고했습니다. 이 연작은 지금은 패션 사진의 관습을 깬 대표작으로 남아 있고, 이번 전시에서도 가장 먼저 눈여겨볼 작품입니다.

찢고 붙인 잡지, 그리고 보이지 않는 베르사유

같은 해 만든 '마키야주'(1975)는 터브빌이 사진을 대하는 방식을 잘 보여줍니다. 흐릿한 사진을 찢고 오려 붙이고 손글씨와 짧은 문장을 더해 만든 가상의 패션 잡지로, 1000부만 제작되었습니다. 팔 물건 하나 없는 패션 잡지라는 점에서, 오늘날 독립 출판물인 '진(zine)'을 앞서간 작업으로 평가받습니다.

1981년 사진집 '보이지 않는 베르사유'는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의 의뢰로 시작되었습니다. 터브빌은 일반에 공개되지 않던 베르사유 궁전 안쪽에 들어갔지만, 금빛 장식 대신 천으로 덮인 가구와 먼지 쌓인 방, 닳은 조각상을 찍었습니다. 가장 화려한 궁전에서 가장 조용한 쇠락을 찾아낸 이 사진들은 '찬란함이 사라진 뒤의 아름다움'이라는 작가의 관심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러시아 문학을 사랑했던 작가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여러 차례 찾았고, 그 결과물이 1997년 사진집 '스튜디오 상트페테르부르크'입니다. 어두운 배경 속 발레 무용수 사진에 푸시킨, 도스토옙스키 같은 작가들의 글을 직접 골라 함께 실었습니다. 1980년 꼼 데 가르송 연작처럼 실제 패션 브랜드와 작업한 사진들도 전시에 함께 나옵니다.

세상을 떠난 뒤 다시 발견된 사진가

터브빌은 2013년 세상을 떠난 뒤 한동안 잊히다시피 했습니다. 흐름이 바뀐 것은 2020년, 뉴욕의 사진 아카이브인 무스 컬렉션(MUUS Collection)이 그의 아카이브를 인수하면서부터입니다. 이후 본격적인 연구와 재평가가 이어졌고, 유럽 미술관에서도 그의 콜라주 작업을 다룬 전시가 열렸습니다. 이번 서울 전시도 무스 컬렉션과 협력해 마련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전시에는 잡지 화보로 알려진 사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메인주 해안 마을의 가족을 찍은 초기작, 오랫동안 집을 두고 머문 멕시코 산미겔 데 아옌데에서의 작업, 그리고 1980년대 후반부터 쓴 미발표 소설을 바탕으로 사진과 글을 엮은 콜라주 130여 점의 '패스포트' 연작까지 함께 다룹니다. 패션 사진가라는 이름 뒤에 가려져 있던 작가의 전체 모습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셈입니다.

관람 정보와 보는 팁

전시는 서울 중구 회현동 전시공간 피크닉에서 2027년 2월 28일까지 이어집니다. 관람료는 성인 1만5000원, 청소년과 어린이 1만원입니다. 2027년 1월 23일에는 스위스 로잔의 사진 미술관 포토 엘리제 관장인 나탈리 헤르쉬도르퍼의 강연도 예정되어 있습니다. 관람 시간과 예매 방법은 피크닉 공식 안내를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 전시는 한 작품 앞에 오래 서서 정답을 찾기보다, 전시장 전체의 공기를 천천히 느끼는 편이 어울립니다. 국내 기사들도 특정 작품보다 전시장에 감도는 여운이 더 오래 남는다고 평했습니다. 선명한 사진이 넘쳐나는 요즘, 일부러 흐릿하게 찍은 사진이 왜 더 오래 기억에 남는지 생각해 보며 걸어 보세요. 집에 사진 작품을 걸고 싶은 분이라면, 흑백이나 빛바랜 색감의 사진이 공간에 어떤 분위기를 만드는지 살펴보는 좋은 기회도 됩니다.

데보라터브빌,피크닉,사진전,패션사진,서울전시,분위기,배스하우스,전시추천

로그인 후 추천을 눌러주시면 작성자에게 커뮤니티 포인트가 지급됩니다.

댓글

    다른 글